삶의 무의미는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또 그 사람의 생애단계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무의미를 톨스토이는 ‘덮쳐진 모호한 기분’으로, 까뮈는 ‘낯섦’, 사르트르는 ‘구토’로 묘사했으며 그 무의미에 대한 대응도 차이가 있다. 다양한 경우를 다 다루기는 어려우므로 우선 얼마 전 신문에 난 동반 자살 기사와 관련하여 삶의 무의미와 삶과 죽음에 관한 개인의 자유와 책임 등에 관한 상반된 관점을 비교해 본다.
1) 기사내용(경향신문, 2013-05-14)
부인의 치매를 비관한 80대 노인이 부인을 차에 태우고 저수지로 차를 몰고 들어가 함께 숨졌다. 지난 13일 오후 4시20분쯤 경북 청송군 부남면의 한 저수지에 승용차가 빠져 있는 것을 산불 감시원(64)이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이씨의 집에서는 “힘들다. (아내와) 같이 간다. 잘 살아라”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유서 한 장이 발견됐다. 부인 ㄴ씨는 치매증상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몇 차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 적도 있었으며, ㄱ씨와 농사철이면 함께 사는 막내 아들이 ㄴ씨를 돌봐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 ㄴ씨가 요양원에 가는 것을 싫어해 ㄱ씨 등이 집에서 간병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ㄱ씨가 16절지 편지지에 쓴 유서에는 “내가 운전할 때 같이 가기로 했다. 이 길 밖에 없다”는 등의 내용도 적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 관련 신문 칼럼(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2013-05-28)
지난 13일 경북 청송에서 자살한 80대 노부부의 사연은 적어도 70대 이상 노인들에게는 아픈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가장 행복한 길이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치매에 걸린 부인을 태우고 자동차에 탄 채로 저수지에 돌진한 88세 노인의 최후는 고령화로 급진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그분들의 처지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들은 부농(富農)이었다. 흔히 그렇듯이 가난해서, 생계를 잇기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자식 3남 2녀가 있었다. 흔히 있는 것처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버림받아서 생을 버린 고독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속된 말로 살 만큼 산 사람이었다. 굳이 자살이란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어도 될 만한 인생이었다. 조금 마음이 괴롭고 조금 몸이 아프고 조금 주위가 산만해도 그러면서 늙어가고 그러면서 인생의 종착역에 가게 되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중략) 그러나 그분들은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들이 택한 것은 자손들에게 험한 꼴 안 보이고 남에게 신세 지지 않고 세상에 추한 모습 보이지 않는, '존엄'의 길을 택한 것이다. 살 만큼 산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버리고 비록 80대가 돼도 자기 생(生)에 관한 결정을 자기 의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줬다.
3) 칼럼에 대한 반박 기고(한겨레신문, 김동현/한림대학교 의과대학 사회의학교실 교수, 2013-05-29)
(전략) 졸지에 남편에 의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살해당한 치매 부인은 차치하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 죽음의 하나인 자살이 어떻게 ‘생에 대한 자기결정의 하나’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말인가? 나아가 “다만 거기에는 동행(同行)이라는 가치가 돋보였다”는 글에 이르면 차마 더 읽어 내려가기가 어려웠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인간사회에서 자살은 합리화될 수 없고, 개인적·사회적 문제 해결의 방안으로 결코 수용 또는 권유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문명의 진화와 사회발전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라 할 수 있다. (후략)
위의 기사와 관련한 칼럼, 반박 기고문을 보면 동일한 사건을 놓고 서로 다른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과연 이러한 동반자살이 인간으로서 존엄을 택한 것이고 자기의지로 자기 생을 결정한 것인가? 아니면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인간사회에서 자살은 합리화될 수 없고, 개인적·사회적 문제 해결의 방안으로 결코 수용 또는 권유 되어서는 안되며 그것은 인간문명의 진화와 사회발전에 대한 명백한 도전인 것인가?
그럼 또 다른 관점의 자살인 공익과 남을 위한 자기희생, 자결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어떤 경우는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 숭상 받고, 어떤 경우는 비난 받아야 하고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과연 자기 자신의 생을 자신이 결정하는 한 행태인 자살은 권리인가, 죄악인가?
논란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주제인데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에 사회 정의와 개인적 윤리 측면이 고려되면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띨 수 밖에 없다. 여기서는 또 다른 자살 기도 사례를 가지고 한 개인의 삶의 무의미의 양상과 이에 대한 대응에 대하여 로고테라피 관점에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II. 무의미의 위기 사례: 생략
III. 로고테라피의 핵심적 사상과 핵심개념을 통한 사례 속 내담자 이해: 내용 생략
1) 인간의 차원을 통한 내담자 이해
(1) 知性的 차원:
(2) 심리적 차원:
(3) 생물적 차원:
2) 인간에 대한 개념을 통한 내담자 이해
(1) 의지의 자유: ‘어떤 조건을 피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어떤 조건에 처해 있든 그것에 대하여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인데 내담자는 현재의 자신의 조건으로 인하여 처해진 가족들의 부담과 자신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정함.
(2) 의미에의 의지: ‘인간은 자기 개인적 삶의 특유한 의미를 실현할 책임이 있다.’라는 것인데 내담자는 이런 상태로 더 이상 연명한다는 것이 자신의 지각과 양심에 비추어 무의미하고 무책임하며 지금까지의 삶의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판단함.
(3) 삶의 의미: 내담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창조적 가치와 경험적 가치, 태도적 가치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해 온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의 상태에서 생을 연장한다는 것은 어떤 가치 측면에서 보더라도 의미 있는 대응이 아니라고 생각함.
3) 책 속의 다른 사례[출처: I Never Knew I Had a Choice(Corey & Corey, 1993)]
내담자이자 친구인 Jim은 25살이었다. 그는 자신이 희귀한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충실한 삶을 살고 밝은 미래를 가진 것처럼 보였었다. 집단에서 그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에 대해 말했고 삶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알았던 많은 부분을 이용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화가 난다고 했다. 그가 말하길, “나는 마침내 내가 많은 것을 줄 수 있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즐기고 싶다!”
상담과 집단 경험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호기심으로 인해 그는 용기를 가지고 죽음을 대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자신의 병이 말기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학교의 사람들과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대학에 다녔다. 병원에 있지 않고 화학요법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무엇보다도 삶을 충실히 살수 없다면 생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Jim은 신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그로 인해 평화와 안정을 얻었다. 그는 주변의 세상과 삶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하기를 원하는 많은 것들을 했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Jim은 해결하지 않은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모든 말을 했고, 장례식 준비를 했으며 부인 Marianne에게 연설을 부탁했다.
Jim은 그의 죽음의 방식이 삶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었고, 그를 통해 나는 죽음과 삶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죽기 전에 잠시 Jim은 25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나이가 더 많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충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자기가 살았던 삶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우리가 죽음에 있어 상실감에 대한 선택을 하지 않을 지라도 여전히 죽음에 대한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THEORY AND PRACTICE OF GROUP COUNSELING, 4TH EDITION, 저자/GERALD COREY 역자/조현춘, 조현재, 이희백, 천성문, 1999, P. 306).
4) 두 사례의 비교
노인과 25세의 청년의 선택은 상당히 다르게 보인다. -중략-
25세의 청년은 희귀한 암이라고만 되어 있기 때문에 비교적 흔한 암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삶을 충실히 살수 없다면 생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입원하지도 않고 화학요법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주변 세상과 삶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왔다. 그리고 신을 받아들여 평화와 안정을 얻었으며 25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나이가 더 많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충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자기가 살았던 삶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로고테라피의 관점에서 두 사례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두 경우 모두 내담자가 스스로 자신의 자유의지로 죽음에 대한 선택을 한 것이므로 존중되고 수용되어야 하나? 아니면 삶에 대한 포기는 용납될 수 없기 때문에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죽음은 제외한 다른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 자유와 책임에 대한 올바른 입장인가?
내가 만약 노인의 입장이라면 25세 청년처럼 이런 저런 의학적 조치를 하지 않고 생을 마무리하는 쪽으로 선택을 하고 싶고, 25세 청년 입장이라면 의사와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희귀 암에 도전하여 치료를 하는 쪽으로 선택을 하고 싶다(물론 어떠한 희망도 없으니 치료를 포기하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이렇게 다른 입장을 선택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란 유한한 수명을 가진 생명체로서 생애 단계별로 삶의 의미를 달리 해야 한다는 가치관 때문이다.
더 이상 개인적 선호를 언급하는 것은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로고테라피의 관점에서 노인의 경우를 어떻게 다루어 나가야 할지 알아본다. (25세 청년의 경우 Corey가 이미 결과를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이상의 비교 정도로만 다루기로 한다.)
IV. 치료적 요인 분석 및 치료전략
이상의 노인 내담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어떻게 치료를 해 나가야 할 것인가? 여기서는 Gerald Corey의 저서 ‘상담과 심리치료의 이론과 실제’ 중 Victor Frankl 의 실존치료이론 6가지 명제를 가지고 생각해 본다.
1) 자기 인식: 내담자는 자신이 얼마 더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과 지금까지의 자신의 자존감, 정체감과는 너무나 다른 현실의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살아있는 것 자체를 스스로 혐오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현재의 모습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의 창고에 가득 담겨 있는 보물들을 소중하게 되돌아 보고 앞으로 남은 나머지 삶에 대해서도 무언가 의미 있는 자산을 축적할 수 있는 노력을 할 수 있도록 자각시킨다.
2) 자유와 책임: 내담자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스스로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인지하고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책임을 지고 자신의 생에 대하여 정리하고자 하고 있다. 자살이 과연 자유와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인지 탐색하도록 한다.
3) 자신의 정체감 발견과 다른 사람과의 의미 있는 관계 정립: 내담자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신의 정체감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하고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나 보다는 자기 자신을 직면하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자신의 남은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선택할 수 있게 한다.
4) 의미의 추구: 내담자는 고령이기 때문에 남은 생이 얼마 없다는 것과 신체적, 심리적 어려움 때문에 삶의 무의미라는 늪에 빠져 있고 이것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경우 실존적 공허 또는 실존적 죄의식은 젊은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처럼 삶의 의미와 방향에 도전하기 위해 사용하도록 할 수 있을까?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생명을 끊는 것보다 내담자 스스로 자신의 상태에 용기 있게 맞섬으로써 자연스럽게 남은 생을 정리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인용) Frankl(1963)은 의미를 발견하는 많은 방법들-치료를 통해서, 사랑을 통해서, 고통을 통해서, 남을 위해 일함으로써-이 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치료의 기능은 삶에서 무엇이 특별한 의미가 되어야 하는지 내담자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그는 고통 조차도 성장의 요소가 될 수 있고, 우리가 고통을 겪을 용기가 있다면 그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고통은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따라 성과로 바뀌어질 수 있다. 고통, 절망, 죽음을 직면하고 우리에 대한 그것들의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삶의 부정적인 면을 성공적인 것으로 바꾼다(THEORY AND PRACTICE OF GROUP COUNSELING, 4TH EDITION, 저자/GERALD COREY 역자/조현춘, 조현재, 이희백, 천성문, 1999, P. 307).
5) 삶의 조건으로서의 불안: 내담자는 심각한 우울증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 나가는데 대한 불안과는 다른 것이다. 즉 무능한 행동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양식을 건설하는 것은 당분간은 불안스럽겠지만 불안은 곧 사라질 것이다 라든지 내담자가 자신감을 갖게 됨에 따라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으로 인한 불안은 차차 감소된다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자신의 자존심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손상된 상태에서 의도하지 않게 삶이 너무 오래 연장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불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어렵겠지만 내담자 스스로 현재의 불안에 대하여 모든 인간이 노후에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통과의례로 받아 들일 수 있도록 한다.
6) 죽음과 무에 대한 인식: 내담자는 실제 죽음에 상당히 가까워져 있고 스스로 삶을 정리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삶의 대칭적인 위치에 있는 죽음을 인식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죽어가고 있는 자기자신을 상상하게 함으로써 자기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자각시켜 자기의 시간을 진지하게 보내고 보다 완전한 삶으로 나아가게 자극을 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생을 마감하는 즉 자살을 하는 것보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하여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할 수는 있을 것이다.
V. 결론
이상 무의미의 사례와 로고테라피 관점에서 내담자를 이해하고 치료전략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삶의 무의미는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또 그 사람의 생애단계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라는 전제로 하더라도 서론에서 언급한 동반자살의 기사와 칼럼, 그리고 내담자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삶의 무의미에 대해서는 이러한 치료전략이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다. 앞으로 몇 년 더 살 수 있을지 모르는 – 일반적으로 자연수명에 다다른 – 상황에서 삶의 무의미 현상은 일반적인 실존적 공허와는 다를 것이라는 본인의 강한 소견 때문에 더욱 정리가 안 되는지도 모르겠다. 호스피스 병동 상황을 무리하게 로고테라피 기법(1. 역설의도, 2. 반응억제, 반성제거, 사고 중단, 3. 의학적 정신지도 (medical ministry), 4. 소크라테스 대화법)에 대응시켜 보려 한 시도 자체가 무리수인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앞의 신문기사와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나도 충분히 그리고 기꺼이 동반자살이라는 선택을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에 더욱 로고테라피의 관점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
그리고 서론에서 거론했던 질문 즉, ‘과연 자기 자신의 생을 자신이 결정하는 한 행태인 자살은 권리인가, 죄악인가?’에 대해서도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였다. Corey의 내담자 사례에 나오는 25세 청년처럼 입원과 화학치료를 거부한 결정도 자신의 의지로 삶을 마감하겠다는 일종의 자살은 아닌지? 일반적인 사람은 절대 자살을 하면 안되고 한계상황이나 자연수명을 거의 다한 경우는 용납될 수 있는 것 아닌지? 이렇게 까지 관점을 확대하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현대인의 일반적 문제상황인 실존적 공허, 그리고 그 실존적 공허로 인한 극단적이고 잘못된 선택인 자살에 대하여 종교적 도덕적 관점에서는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으나 남이 아닌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의 선택이라는 관점에서는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나의 개인적 입장에서는 상황에 따라서 자살도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고 책임감있는 행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몇 년 전 자살의도를 가지 젊은 주부(자살 고 위험 상황은 아닌 것으로 판단)를 상담할 때 나눈 대화처럼 자살 이후의 상황을 직면시켜 다른 대응을 생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노력은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전략)
주부: 이 모든 문제가 나의 책임이므로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져 주는 것이 남편이 새 출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최선의 길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나: 남편이 새 출발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지요?
주부: 현 괴로움의 원인인 내가 없어지면 당연히 남편은 재혼을 할 것이고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은 삶을 살지 않겠어요?
나: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 남편이 행복한지 아닌지 누가 확인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부: 글쎄 죽고 나면 제가 이 세상에 없으니까 확인할 수는 없겠지요.
나: 남편의 행복을 정말 기원하세요?
주부: 예, 그리고 이게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제가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같다는 생각이에요.
나: 만약 당신이 의도한 것처럼 되지 않고 남편이 자살해 버린 당신을 원망하고, 당신의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괴롭게 살아간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다시 살아나와서 그런 의도가 아니었으니 마음 편하게 행복하게 살라고 말씀하실 건가요? 정말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이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살아 있으면서 혹시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사태가 흘러가면 당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해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당신이 죽고 나면 남편을 위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남편을 위해서 최선의 방법이라고요? 유서 한 장 남겨놓고 자살한다는 것은 ‘내가 자살까지 했으니 나를 용서하고 면죄부를 달라’또는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나를 동정해 달라’라는 자기 중심적이고 무책임한 행동 아닌가요? 죽고 난 뒤에 주변의 반응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으면 그땐 어떻게 할 건가요? 이미 당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주부: …………(눈물).
(후략)
결론다운 결론은 내리지 못했지만 로고테라피는 상담의 실존주의적 접근 중 하나이므로 상담에 임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제한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van Deurzen-Smith(1990a)가 제시한 실존주의 접근의 제한점 요약>
출처: (THEORY AND PRACTICE OF GROUP COUNSELING, 4TH EDITION, 저자/GERALD COREY, 역자/조현춘, 조현재, 이희백, 천성문, 1999, P. 316)
◆ 실존주의의 기본 가정들을 검토하거나 인간 실존의 근본을 탐색하는데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실존치료는 부적절하다.
◆ 구체적인 증상들을 제거하려는 내담자나 문제 해결 방법을 찾는 내담자에게는 이 접근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실존주의 치료자는 내담자가 삶의 진실에 대면하도록 지지하는 자문자 역할을 한다. 이 접근은 자신에게 지시해 주거나 부모 대리인 역할을 해 줄 치료자를 찾는 내담자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유능한 실존주의 치료자란 매우 성숙하고, 많은 삶의 경험이 있으며, 철저한 지도와 훈련을 받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접근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치료자나 자신이 유용한 지식을 지녔다는 생각으로 내담자나 자기자신을 기만하는 치료자는 쉽게 잘못을 저지른다. (이상)